[나눔장례지원] 고 함소자님, 고 공덕유님, 고 김국진님 고이 잠드소서

마지막 가시는 길은, 세 분 모두 외롭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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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6일 무연고 사망자 장례식은 다른 장례식보다 마음이 더 무겁고 안타까웠습니다. 세 분의 무연고 사망자 중 두 분이 스스로 세상과 연을 끊으신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떠난 분들의 삶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주변분들에게 물어봐야겠지만, 안타깝게도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구청에서 받은 공문 세 장이 전부입니다. 공문에는 단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고 주소지는 어디인지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에 대한 짤막한 결론이 날카롭고 딱딱하게 생긴 표 안에 들어있을 뿐이었습니다. 처음과 끝만 있을 뿐 삶의 여정을 채워줄 사람은 없습니다.

유가족과 마지막 동행, 그래도 다행입니다.

무연고자 중 한 분의 유가족분들이 화장장까지 오셨습니다. 고인의 오빠와, 고인의 친딸, 그리고 조카 두 분입니다. 안타깝게도 고인의 관에 뚜껑이 덮히고 나무못으로 박혀 있어 유가족은 고인의 마지막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고인의 관이 화장장으로 이동할 때 유가족 분들은 관을 쓸쓸히 만지며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인은 딸을 낳은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이혼했다고 합니다. 고인의 따님은 워낙 어린시절에 어머니와 이별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엄마에게 엎히고 안겨가며 엄마의 목소리와, 냄새, 체온을 온 몸으로 기억하기도 전에 엄마와 이별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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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혼자의 몸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삶의 살았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시절 이혼한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건 그리 쉽지 않았을 겁니다. 낮동안 손이 불어터지게 일을 하고 집으로 들어오면 아무도 없는 방안의 쓸쓸함이 고인을 감싸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노후를 준비하는 것 또한 고인에겐 사치였는지도 모르지요. 칠십이 조금 넘은 나이까지도 고인은 청소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칠십이란 나이는 인생을 정리하고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이었지만, 고인에게는 대걸레를 들고 뛰어다니며 청소하다가 용역 업체의 직원들에게 ‘아줌마’라는 존재로 삶을 살고 계셨네요.

어쩌면 산전수전의 삶이 단련되었을 법도 한데 함소자님은 70여년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셨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을지 보지는 못했지만 고인의 삶의 흔적들과 참 많은 아픔이 마음 깊이까지 느껴지는 장례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고인의 따님은 장례식 도중에 눈물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함소자 님의 다른 유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가족들이 마지막 가시는 길 함께해서 다행입니다. 나눔과나눔과 미리 연락이 되었다면 가족들이 무연고자로 포기하지 않고 조금더 고인을 잘 보내드릴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함께 드는 장례지원입니다.

함소자님 고이 잠드소서.

고립된 고시원, 그리고 빨래줄

김국진님이 사망하신 곳은 고시원이었습니다. 김국진님이 사셨던 고시원은 주택 밀집 지역이나 학교 주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시원의 앞으로는 커다란 도로가 있었고, 뒤로는 서울역 방향의 철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시원의 바로 옆에는 고물상이 커다랗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낮과 밤 모두 기차와 차가 다니는 소리가 귀를 불편하게 할 것 같았고, 고시원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고물상으로부터 불어오는 냄새로 싼 값에 머물 곳을 찾는 사람 외에는 이곳에 거주할 사람이 없어 보였습니다. 고시원을 둘러 싼 주변의 경치 또한 바로 앞에 있는 가로수를 제외하곤 그저 황량한 회색빛의 서울뿐입니다. 김국진님이 사셨던 마지막 집은 도로를 걷다가 흔히 볼 수 있는 쓸쓸한 느낌이 묻어나는 그런 많은 건물 중 하나였습니다.

김국진님은 월세 30만원 내외의 1.5평 남짓한 방에서 얼마나 계셨을까요. 고시원의 내부는 주황색과 갈색의 타일로 인테리어가 돼있었습니다. 깔끔해 보이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이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서로 간에 주고 받을까. 과연 이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떠들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의를 받은 적은 있었을까. 고인이 살던 고시원도 복도를 경계로 좌우로 수많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습니다. 방과 방 사이를 나누는 얇은 벽에 각 방의 사람이 등을 맞대고 있으면 서로의 체온이 통할지도 모르는 그런 얇은 벽인데도 고시원은 늘 조용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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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진님은 옥상에 있는 빨래줄로 스스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고인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고민의 밤이 있었고, 마지막 고시원 옥상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은 또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면, 2016년 서울 하늘을 함께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집니다. 내 가족의 일이 아니라고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하루에 짧은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을까? 고시원에서 돌아가셨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 고인도 ‘고립’된 상태에서 고시원의 침묵에 묻혀 마지막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시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김국진님 고이 잠드소서.

해방둥이 그리고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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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유 님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이 사셨던 곳은 서울 안쪽이기는 하지만, 주위에는 산이 많고, 밭도 많아 서울 안의 시골처럼 보이는 곳입니다. 하지만 사셨던 곳이 시골과 같다고 해도 시골 특유의 공동체는 없었던 듯 보입니다.

고인의 시신은 유족이 사체 인수 거부를 하여 무연고로 행정처리가 되었습니다. 유족들은 고인의 시신 인수를 어떤 이유에서 거부하셨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참 다양한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다만, 지인분들과 이웃들에게 알리고 함께할 수는 없었을까하는 아쉬움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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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혹은 45년. 고인은 해방둥이로 태어났지만 고인의 마지막은 외로웠습니다. 고인이 태어났을 때 일제가 물러갔으니 앞으로 살만한 세월이 올 것이라며 이웃들과 가족들이 축복을 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아들이니 가족들에게는 행복한 순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70여 년의 삶의 마지막은 가족 대신 나눔과나눔이 대리상주로 함께해 드렸습니다. 장례지원을 하면서 가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꼭 혈연관계만을 가족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역시 가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덕유님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