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의 장례는?

잡초는 없다! ‘잡초’같은 사람은?

변산에서 흙을 만지는 철학자 윤구병는 ‘잡초는 없다’고 주장한다. 인디언들의 언어에도 ‘잡초’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은 내가 기르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잡초’이고,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니 ‘잡초’라고 부른다. 세상에 존재 이유가 없는 풀은 없다. 지금 나에게 쓸모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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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떨까? 사람 역시 ‘잡초’같은 사람이 존재할까?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적어도 사회가 요구하는 필요한 교육을 마치지 못한 사람, 심지어 뚱뚱하거나 못생긴 사람,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상품가치에 부합하지 않아서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쓸모없다’고 한다.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 즉 사회적으로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은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러미 벤담의 주장처럼 강제수용소를 통한 인간개조가 정답일까? 아니면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저 생존만 유지하기 위해 사회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1920년대 독일 헌법학자 칼 빈딩의 주장처럼 안락사를 시켜야 할까? 실제로 히틀러는 이러한 인식을 받아들여 정신질환자들과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다. 오직 쓸모와 비용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하고 야만스러울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교훈이다.

 

 살처분 매립된 소·돼지처럼 매장 또는 화장이면 충분?

그렇다면 흔히 ‘쓸모없다’고 치부된 사람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거나 ‘강제학살’하는 것은 문명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죽으면 장례는 어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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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나눔에서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지원하다보면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안타까운 가족사를 접하게 된다. 지난달 7월, 1970년생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준비할 때였다. 구청 무연고사망자 담당자에서 들은 사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의 어머니가 시신을 위임하며서 구청으로 편지를 보내셨는데, ‘고인은 20년 전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부모를 학대했으며, 현재 어머니는 고혈압, 심장혈관협착, 당뇨 등으로 몸이 좋지 않으실 뿐 아니라 아버지 또한 거동도 불편하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시신을 위임한다는 사연이었다. 그리고 지난 2월, 화장장에서 1955년생 무연고사망자 시신을 운구하려고 할 때였다. 시신인수를 포기한 아내분이 화장장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들려준 고인의 삶의 이야기 또한 충격적이었다. 둘째 출산 후 20일도 안돼서 굉장히 아팠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남편이 그냥 집은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전국을 찾아다녔지만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28년만에 어느 반지하 월세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너무 괘씸해서 시신인수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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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고 슬픈 가족사다. 이렇게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시신인수를 하지 않은 가족의 입장이 이해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족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무연고사망자들, 혹은 사회적으로 ‘쓸모없다’고 치부된 사람들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을 구제역으로 살처분 매립되는 소·돼지처럼 그냥 땅에 묻거나 화장처리 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이들에게 장례식과 같은 장례절차와 고인예식은 그들의 삶을 비춰볼 때 과분한 것이고 사회적 낭비일까?

 

죽음의 타자성과 개인화를 넘어

죽음은 근대까지만 해도 사회적 현상, 즉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고 집단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자 집합적인 상징들과 의식들로 둘러싸여 있는 사건이었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은 ‘몸의 개인화’를 강조하게 되면서 죽음이 개인적 사건으로 축소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단지 죽은 사람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장례절차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면은 사회적 측면이다. 최소한 문명사회라면 고인이 어떠한 삶을 살았든 상관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유지하면서 삶을 마무리 짓도록 공동체적 차원에서 의식과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쓸모없는’ 사람조차도 구제역으로 살처분 되는 소·돼지처럼 그냥 땅에 묻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면은 개인적 측면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의식과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가족과 지인들은 개인차원에서 그리고 감정적으로 돌아가신 분과의 희로애락를 정리한다. 그러면서 가족과 지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속에 응어리진 회한을 풀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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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으로 본다면 꼴도 보기 싫은 가족의 시신을 인수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쓸모없는’ 사람을 위한 장례절차와 고인예식은 사회적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장례절차의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보고, 나눔과나눔이 진행했던 두 분의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떠올려 보자. 지난 2월 너무나 괘씸해서 남편 시신인수를 거부했던 아내가 굳이 그 한 겨울 추위에 벽제에 있는 화장장까지 와서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왜 지켜봤을까? 그리고 지난 달 7월에 아들의 시신을 인수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과거의 아픈 상처와 건강상의 이유 등을 들면서 편지를 보내왔지만 마지막에 언급했던 ‘경제적’ 이유가 실제 시신인수를 거부했던 본질적 이유는 아니었을까? 즉 미운 자식이지만 장례를 할 경제적 여유와 형편이 되었다면 장례를 치르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은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죽음은 단지 개인적 사건이 아니다. 사회적 현상, 즉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고 집단적 차원으로 접근해 야 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타자성과 개인화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사회는 가족의 유무와 무관하게 공공성을 갖춘 공영장례 절차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돌아가신 이가 어떠한 삶을 살았던 관계없이 말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과연 누가 누군가의 삶을 ‘쓸모없는’ 삶이라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을까?

※ 이 글은 나눔과나눔 박진옥 사무국장이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