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장례지원] 故 박재수 님, 고이잠드소서

자신이 너무 철이 없었다며, 가족한테 너무 못해서 볼 면목이 없다…… 시던 故 박재수 님
꼭 암을 이겨내서, 딸에게 찾아가시겠다 던 故 박재수 님
(삼일교회 사랑나눔부 노숙인 구제사역팀이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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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고 5일을 기다렸습니다. 20여 년 전에 헤어진 가족이 찾아오기까지, 그리고 저승으로 가지 못한 기다림의 시간이 참 길었습니다. 삼일교회 지인분들은 경찰과 서울에 있는 동주민센터에 가족을 찾아달라고 요청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남양주에 있는 동주민센터에 부탁하고 부탁해서 겨우 가족에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다행입니다. 5일의 기다림에 끝에 이 세상과의 이별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지인분들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었다면 고인은 분명 무연고사망자가 됐을 겁니다.

아내와 딸이 20여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장례식장까지 오는 길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세 살배기 딸이 20대가 되었고 아내는 고인의 마지막 얼굴을 보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차마 입관식에는 참여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세월의 감정을 누가 감히 재단하고 가늠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마지막 가는 길에 와서 고인을 마주하고 그동안 켜켜이 쌓았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아마도 장례식장에 오는 것 자체만으로 여러 생각과 고민이 있었을 겁니다. 아내는 영정 앞에서 한참 동안 고인을 바라보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용서해야지”라고 하시며 오랜 세월 동안 묵혀온 감정을 털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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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고인도 그 유명한 58면 개띠입니다. 고인의 삶은 한국 사회의 베이비붐 세대의 전형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먹을 게 없어서 고생하다가 경제호황기를 맞아 한때는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절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마주하게 된 IMF 경제위기. 이렇게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고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노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인천에서 한참을 노숙하며 지내셨다고 합니다. 장례식장에는 인천에서 알고 지내던 목사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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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고인은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가 삼일교회와 인연을 맺으며 삶에 대한 의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시니까 제가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한번 도전해보려고요. 다시!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순댓국을 좋아하시던 고인. 이렇게 다시 한번 더 삶에 대한 의지를 찾은 순간 가슴 통증으로 찾은 병원에서 식도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투병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고인은 투병 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고 합니다. 식도암 4기였지만 꼭 암을 이겨낼 거라 하시면서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는 것도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통증이 심해지면서 결국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신 후 지난 7월 15일 일요일 오전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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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고 4일이 지난 19일 어렵게 찾은 가족과 함께 용인 호스피스 병원에서 영등포 신화병원으로 고인을 모시고 와 빈소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20일 벽제승화원에서 이 별과의 마지막 이별을 하셨습니다. 아내와 딸 역시 고인과 짧은 만남 이후 다시 긴 이별을 했습니다. 고인이 남기신 마지막 말 한마디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지. 가족에게 너무 못해서 차마 볼 면목이 없어. 꼭 암을 이겨내서 딸을 찾아가야지.”

삼일교회 사랑나눔부 노숙인 구제사역팀, 신화병원장례식장, 대명아임레디에서 박재수 님 마지막 가시는 길 동행해주셨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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