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장례지원] 故 박일영 님, 고이 잠드소서

장례 마치고 돌아와 저녁 어스름에 (아버지가 사셨던) 세검정 집 하늘을 보니 채운(彩雲, 무지개)이 떠 있네요. 아버지의 마지막 작별인사인 것 같네요.
빈소를 마련하고 아버지를 현충원 안장까지의 헌신적인 도움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장례를 마치고 고인의 아드님이 보낸 감사문자입니다.)

20180722_박일영 수급자 장례지원 (23)

고인은 기초생활수급자셨고, 위암으로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하셨던 환자입니다. 그리고 아드님은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었지만 신용불량에 한 달 약 50여만 원이 안 되는 생활비로 생활하고 계신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고인 장례는 종로구 부암동주민센터 사회복지 관련 주무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고인을 담당했던 주무관이 장례를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 없을까 해서 나눔과나눔을 알아보고 안내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장례가 가능했으니까요. 사실 장례 관련 중앙정부 지원은 장제급여 75만 원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장례 관련 문의가 와도 장제급여 외에는 지원이 없다고 답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눔과나눔 장례지원을 알아보고 연계까지 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20180721_박일영 수급자 장례지원 (3)

아드님은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극단적으로 시신 인수 거부까지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자녀가 다른 것도 아니고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부모의 시신 인수를 포기하려고 할 때의 심정은 어떨지 가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다시 한번 공공에서 최소한의 장례를 지원하는 공영장례제도가 절실해집니다.

20180721_박일영 수급자 장례지원 (15)

고인은 1930년 황해 해주 출생으로 1950년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대위로 전역하셨고, 1953년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당시 고인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한국전쟁과 그 혼란한 시기를 살아낸 고인의 삶 자체가 어쩌면 한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태어나 당시 국민학교에서는 한국말 대신 일본말을 사용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청년기에는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후에 경제 발전기와 호황기에는 가족과 행복한 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드님이 빈소 앞에 두셨던 가족 앨범을 보면 그런 삶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결혼식 사진, 성당분들과 함께 촬영한 빛바랜 사진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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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한국 전쟁 참전 장교이기 때문에 국가보훈처를 통해 재향군인회 상조회의 장례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화 꽃바구니도 빈소에 둘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재향군인회 상조회 장례지도사분들이 오셔서 꽃염으로 고인을 잘 모셨습니다. 직접 장미꽃과 안개꽃을 사 오셔서 관 속을 예쁘게 장식하고 고인도 연꽃처럼 화려하게 꾸며주셨습니다. 마지막은 태극기로 관보를 대신했습니다. 국가에 헌신한 분들을 정성을 다해 보내드리려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장이 마련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지원도 받을 수 없었던 터라 장례식장을 포함한 장례지원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야 가족들도 처음부터 시신 포기와 같이 극단적인 선택 대신 안심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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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마치고 아드님이 보내주신 마당에 핀 꽃과 하늘의 채운(彩雲) 사진이 주말 장례지원으로 지친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됐습니다. 이런 문자들이 어쩌면 내가 혼자가 아니고, 당신이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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