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세상에 하는 마지막 유언, “장례를 부탁해”

오늘도 신문을 펼치면 ‘1인 가구’와 ‘사회적 고립’, 그리고 ‘고립사(孤立死- 이 글에서는 ‘고독사(孤獨死)’라는 용어 대신 사회적 고립 가운데 사망했다는 측면에서 ‘고립사’를 사용함)’에 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예방하겠다며 다양한 지자체별 대책들도 함께 보도된다. 한국사회는 ‘고립사’를 막기 위해 공동체 회복과 이웃과 관계 맺기 중심의 ‘예방책’을 주요하게 처방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의 예방책도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적 고립 속에서 홀로 죽고, 죽은 후에도 상당 기간 방치되는 ‘고립사’라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죽음’ 그 자체와 ‘장례’라는 존엄한 삶의 마무리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관심 밖이다. 사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은 근대까지만 해도 단지 개인적 사건이 아니었다. 사회적 현상, 즉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고 집단적 차원으로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집합적인 상징들과 의식들로 둘러싸여 있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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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엔가 ‘죽음’은 행복이자 돌파구

‘죽음’, 이 단어에 어떤 사람들은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불안’과 ‘공포’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많은 사람은 죽음과 연관된 색을 ‘검정’으로 연상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죽음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자동 쪽방 주민들. 내가 만난 동자동 주민들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는다는 건 행복하지요. 나는 행복하다고 봐. 아무 걱정 없고 … (중략) … 내가 밥그릇 내가 먹는데도 그릇 닦으려고 집 한 칸 없어가지고 줄 서 있는 모습. 그렇게 하나 타서 먹겠다고. (줄 서는) 그런 모습도 없고”

“(죽음은) 돌파구, 현재에서 피할 수 있는 돌파구.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 하나의 비상구지. 현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구”

예상 밖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떻게 죽음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사회적 단절과 고립된 현실에서 건강이나 재정적으로 또한 사회적 관계에서도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죽음은 오히려 현실의 도피처이자 돌파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살면서 뭐 하나 제대로 기댈 것 없는 버거운 현실. 이로 인해 미지의 ‘불안’인 죽음마저도 오히려 ‘기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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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유언, 장례를 꼭 부탁해

2017. 8월 무더웠던 여름날 동자동사랑방 주민들과 함께 이웃 홀몸어르신의 장례를 치렀다. 여든이 넘었던 고인은 돌아가시기 3개월 전인 5월 초, 사랑방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은 사랑방식으로 원한다. 장례 치러 달라. 유골 뿌려 달라. 내 삶을 마치고 떠나갑니다.”

마지막 유언은 장례 부탁이었다. 동자동사랑방 이웃들이 함께하는 소박한 마을장례. 홀몸어르신이었던 고인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고인의 부고에 응답하는 가족이 없어 무연고사망자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마도 고인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본인이 죽으면 자신의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꼭 장례를 부탁하고 싶어서 이런 마지막 유언을 작성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고인은 부탁할 이웃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동자동사랑방 이웃들은 유언을 지키기 위해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 나눔과나눔이 진행하는 장례식에 참여해서 운구도 하고, 향도 피워드리며 국화꽃 한 송이 올려드렸다. 좋아하시던 술 한 잔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이웃들은 고인의 마지막 부탁에 따라 소박한 장례로 고인을 떠나보냈다.

내가 만난 동자동 주민들은 이웃들이 함께하는 마을장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장례식을 굉장히 이걸로(최고의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알아요… (중략) … 이렇게 핏줄도 아니고 이렇게 해가주고 (장례를) 해준다는 것 굉장히 이걸로(최고로) 알아요.”

그러면서 마을장례에 참여한 사람들이 본인 자신의 장례를 위해 이런 부탁을 자주 한다고 한다.

“나도 죽으면 이렇게 좀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 혼자 가게 하지 말고…(중략)… 나를 꼭~이렇게 해서 좀 뿌려주고”

왜 동자동 주민들은 본인 자신의 장례를 중요시하고 세상의 마지막 유언으로 서로에게 장례 부탁을 하는 것일까? 어떤 주민은 장례를 위해 장판 밑에 돈을 모으기도 했다고 하니, 본인 자신의 장례에 대한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 각별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죽으면 모두 끝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장례를 꼭 치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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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마지막까지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한 분투의 과정

한국인 중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은연중에 ‘환생’을 믿는 내세관의 경향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동자동 마을장례에 가면 “좋은 데 가셔라. 다시 태어나면 잘 살아라”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사실, 우리는 죽은 후의 삶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다. 하지만 동자동 쪽방 주민처럼 현실이 너무나도 버거워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면, 결국 기댈 곳은 죽음과 다음 생에 대한 열망 밖에 남지 않는다.

동자동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여기에 이렇게 오래 머물지는 몰랐다고. 잠시 있다가 기회를 봐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계획이었다고. 이들은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 지금도. 그 열망이 현실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이제는 혹시 존재할지도 모른 다음 생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고, 장례에 대한 각별한 마음으로 나타났다고 봐야한다.

이번 생의 삶은 사회적 단절과 고립된 속에서 무엇 하나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 가운데 죽음은 오히려 현실의 도피처이자 돌파구가 되어 버린 쪽방 주민들. 하지만 혹시 죽은 후에 또다시 삶의 기회가 온다면 좋은 곳에서 이번 생보다는 더 잘 살고 싶은 마음, 즉 장례는 이들에게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관문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동자동 쪽방 주민에게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의미는 삶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그래서 잘 살고 싶고 다른 삶을 살고 싶은데도 현실은 그럴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투영된 분투의 과정 말이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 올 때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왔다고 해서 세상을 떠날 때도 모두 같은 모습으로 떠나는 건 아니다. 죽음의 의식인 장례를 진행하는 것이 누군가에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마지막 유언으로 장례를 부탁하는 동자동 주민들. 이들의 모습에서 영화 ‘스틸 엘리스(Still Alice, 2014)’의 주인공인 엘리스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과정에서 했던 명대사가 떠올랐다.

“제가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Please do not think that I am suffering. I am not suffering. I am struggling. Struggling to be part of things, to stay connected to whom I was once.)

 

※ 이 글은 나눔과나눔 박진옥 사무국장이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