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남 칼럼]이 땅에서의 존엄한 죽음을 위하여

저는 사람들의 행복한 죽음을 돕는 웰다잉 플래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럽게, 편안하게, 돈 덜 쓰고(?)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일들을 하고 있지요. 어르신들께서는 죽고 나면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은 봤어도, 염을 해주는 사람은 봤어도, 잘 죽는 것 도와주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시지요. 그런 일들을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소위 말하는 웰다잉, 즉 잘 죽는 법(?) 그리고 잘 사는 법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다닙니다. 결혼식을 계획해주는 웨딩 플래너, 자산을 관리해주는 금융 플래너, 요새는 건강을 관리해주는 헬스 플래너라는 직업까지 생겨났지만, 그래도 좋은 죽음까지 계획해준다는 웰다잉 플래너라는 직업은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마땅치 않은 직업인 것 같습니다.


[사진설명: 웰다잉 플래너 강원남 소장이 광화문에서 캠페인하는 모습]

그런데 그런 제가 최근 수업시간 마다 곤혹을 치루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한 신문에서 보도된 ‘안락사’ 때문이지요. 외국인 안락사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인 스위스의 조력자살단체 ‘디그니타스’에서 2명의 한국인이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과 함께, 한국인 107명이 같은 방법으로 삶을 마감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보도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진 이후로 어르신들은 수업 시간 때마다 어떻게 하면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는지, 얼마의 비용이 드는지 물으시거나, 혹은 우리나라에서도 왜 그런 것들이 안 되냐며 종종 열을 올리며 성토하시곤 합니다. 아마도 제가 잘 죽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니 분명 안락사 하는 방법도 알려줄 것이다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안락사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저 조차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설명:2018년 웰다잉 후원토크 콘서트 “죽음에게 물었더니 삶이라고 답했다”에서 강연 중인 강원남 소장]

물론 영상을 통해서 스위스에서 안락사가 어떻게 시행되는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생사학 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연구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안락사 역시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안락사에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몇 가지 반론들을 조심스럽게 말씀 드려보고자 합니다.

첫째, 안락사라는 용어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는 곧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 되기도 합니다. 안락사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안락의자가 생각나기도 하고, 조용히 잠자듯 편안히 눈을 감는 순간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안락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더 정확한 의미로 우리가 생각하는 안락사는 크게 적극적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적극적 안락사는 강제로 약물을 투여하여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의사조력자살’이 있는데 이는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말기 환자나 불치병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경우, 곧 의사가 도와주는 자살을 의미합니다. 의사가 치사량에 해당되는 약물을 환자의 손에 쥐어 주고, 환자의 의지에 따라 이를 스스로 복용하는 것이지요. 현재 스위스는 적극적 안락사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의사조력자살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안락사’의 과정은 결코 안락하지 않았습니다. 약물을 삼킨 환자는 고통 속에서 신음을 내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환자의 가족들도, 주변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약물을 복용한 후 수분 내에 사망을 하기도 하였지만, ‘안락’이라는 단어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둘째, 스위스의 조력자살단체 디그니타스 관계자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조력자살이나 안락사를 허용한다면 모든 국민이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공공 의료 시스템과 통증 완화 의료 제도도 동시에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치료를 받을 돈이 없거나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조력자살을 선택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현재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은 공공의료 시스템이나 완화의료제도가 매우 잘 갖춰져 있다. ” 즉 디그니타스 관계자의 말처럼 의사조력자살, 소위 말하는 안락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공공의료시스템과 통증완화의료 시스템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다운 존엄함을 잃지 않으며, 고통 없이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완화의료제도의 혜택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고, 그 끝에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근거한 안락사가 이루어져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진설명: “국내 언론 최초! 스위스 조력자살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 대면 인터뷰” 유튜브 화면 갈무리]

현재 우리나라는 2018년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단계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으며, 환자 스스로 의사를 밝힐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제도들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현재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은 전국에 단 83개 1,341개의 병상이 운영되고 있어 말기질환자 및 암환자들이 이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의 죽음의 질(質)이 OECE 40개국 중 18위로 낮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평생 쓰는 병원비의 절반을 죽기 한달 전에 사용하고, 평생 쓰는 병원비의 25%를 죽기 3일전에 쓴다는 통계는 임종 과정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보호자들은 결국 환자의 시신마저 포기하게 되어 무연고 사망자가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안락사가 법으로 허용된다면,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선택을 할 이들은 아마도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이 우선이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삶의 마지막 끝을 고통 없이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아무런 장치도 마련되지 않은 채 안락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자살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 타살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말기 질환이나 불치병 환자의 경우 주위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를 우리는 세계 2차 대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시행된 T4 작전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라고 판단된 장애인들이나 유전병, 정신병 환자는 열등 분자이기 때문에 단종 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30만 명 이상을 안락사 하였습니다. 이처럼 안락사의 대상은 임종을 앞둔 환자에서부터 말기환자, 그리고 점점 더 넓은 범위로 확대되어 효용성 없는 생명까지 확대 될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장애인, 치매환자, 만성질환자까지 말이죠. 2018년 네덜란드에서는 오랜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29살 여성에 대한 안락사가 허가되어 의사조력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결국 이는 경제성에 근거하여 비생산적인 생명에 대한 단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팔다리가 없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세계적인 희망 전도사인 닉부이치치 역시 안락사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는 걸 까요? 이는 어쩌면 사회적 약자와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일 수 있습니다.


[사진설명: 폴란드에 있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스위스에서 안락사로 삶을 마감한 한국인의 곁에서 함께 동행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며칠 후 그는 한 줌의 재가 됐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는 자기 삶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존엄한 죽음이었을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적어도 저에게 친구의 죽음은 존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친구 스스로는 존엄한 죽음을 택했다고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마주했던 죽음을 앞둔 이들은 대부분 살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호스피스에서 삶을 마감하셨던 분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남은 시간동안 서로 마주하며 주어진 삶을 포개어 추억하고 감사했습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못 다한 매듭을 풀어내었습니다. 그렇게 가족의 품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다음 생을 기약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비록 슬프지만 아름답고 또 존엄했습니다.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한 이들은 정말 마지막 순간 미소 지을 수 있었을까요? 행복했을까요? 그래서 저는 존엄한 죽음은 설산이 펼쳐진 먼 이국땅에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곳에서 가족들의 품안에 안겨 사회와 제도의 보살핌을 받으며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위해 작은 조약돌 하나라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이글은 “행복한 죽음 웰다잉 연구소” 강원남 소장이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