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남 칼럼] 죽음에도 복지가 필요할까요?

2014년. 행복한 죽음 웰다잉 연구소를 개소하고 한동안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지요. 사회복지사들은 저를 웰다잉 강사로 불렀고, 웰다잉 강사분들은 저를 사회복지사로 불렀습니다. 물론 연구소의 주요 활동이 전국의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웰다잉 교육을 하고 있으니 주 활동은 웰다잉 강사가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고,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신념들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왜 죽음에 관한 복지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사회복지 현장은 대상별, 상황별로 다양한 복지 체계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복지, 노인 복지, 장애인 복지, 여성 복지 심지어 최근에는 동물 복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복지의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삶을 들여다보면 복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죽음에는 복지라는 단어가 붙지 않을까 의아했습니다.


[사진설명: 2014.7.8. YTN 뉴스 새로나온 책 소개 화면 갈무리]

그러던 중 우연히 서울대학교 의대 윤영호 박사님의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음 복지’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책에서는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무의미한 연명의료중단과 호스피스 완화의료 제공을 통하여 죽음 복지와 죽음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였지만, 이 단어를 통하여 저는 죽음 복지라는 단어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또 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사회복지가 인간의 생활을 원조하는 활동이라면, 이에는 당연히 인간의 죽음 준비를 돕는 일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죽음에 직면해서 개인이 겪게 되는 고통과 염려를 본인이나 가족들과의 상담을 통해 완화시키거나 해결하는 일들을 의미한다.」(장인협, 최성재, 1998) 이 구절을 통해 저는 제가 하는 일들이 분명한 사회복지의 영역이며 사회복지사로서의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성이 임신 하면 태교를 하고, 몸에 좋은 음식들을 챙기며, 아이의 배냇저고리와 유아용품들도 준비하며 열 달 동안 아기가 태어날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언젠가 한번쯤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맞이할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상조보험, 영정사진, 수의 등을 준비할 뿐, 죽을 때 얼마나 아플지, 돈은 얼마나 들어갈지, 죽고 난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남겨진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두렵고 무섭습니다. 게다가 준비되지 못한 죽음은 더욱더 슬프고 당황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육체적, 심리적, 영적, 사회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도 슬프고 두렵고 무섭습니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선의를 가지고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 어떻게 해서든 죽음의 순간을 연장하다 보니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됩니다. 또 의료현장에서 맞게 되는 죽음은 많은 비용을 수반합니다. 평생 쓰는 병원비에 절반을 죽기 한 달 전에, 삼 분의 일을 죽기 3일 전에 쓰게 됩니다. 눈을 감은 이후에도 평균 1,500만 원 내외의 돈을 들여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습니다. 장례식을 치를 돈이 없어 어머니의 시신을 차에 싣고 다니다가 구속된 아들의 사례도 있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 보낸 이후에도 가족들은 위로받지 못한 채 정신없이 장례절차를 치르기 분주합니다. 손님을 접대하기도 바쁜 나머지 눈물을 추스를 시간도 없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상복을 벗고 나서야 겨우 눈물이 터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차마 눈물도 닦지 못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 삶의 의미를 잃고 끝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분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40분에 한 명, 하루에 관광버스 한 대에 탄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나아가 죽어서조차 발견되지 못하는 고독사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범죄와 사고, 사회적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큰 상처로 남은 세월호 사고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떠나  보낸 이들은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시간은 아직도 2014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렇듯 많은 이들이 죽음의 상처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사진설명: 2019.5.무연고사망자 장례에 참여한 교회 지인분들이 갑작스럽게 떠난 고인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다]

그렇기에 죽음에도 복지가 필요합니다. 복지는 단지 삶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수십 번 수백 번을 죽음과 마주합니다. 사람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습니다. 따라서 행복하게 죽었다는 것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의미이며,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비참하게 살았음을 뜻합니다. 곧 죽음의 복지는 삶의 복지이며 잘 죽도록 돕는다는 것은 곧 잘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마주해야 합니다.

과일마다 씨앗이 들어있듯, 생명에는 죽음이라는 씨앗이 들어있습니다. 생명은 죽어도 씨앗은 남아 다시 생명을 잉태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좋은 죽음은 남은 이들이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양분이 되지만, 아픈 죽음은 남은 이들의 삶을 병들고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마주해야 합니다.

사회복지사냐, 웰다잉 강사냐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오히려 앞으로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개인의 죽음 준비도 중요하지만,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의 제도와 정책도 중요합니다. 나아가 자살, 고독사, 사고사 등과 같은 사회적 죽음을 예방하도록 도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웰다잉 강사이자, 죽음 복지를 이야기하고 죽음 복지를 실천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조금은 두렵고 무섭고 무거운 주제이지만, 사회복지 현장에서 더 많은 사회복지사들이 죽음을 마주하며,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곧 잘 살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글은 (사)나눔과나눔 이사로 활동 중이신 ‘행복한 죽음 웰다잉 연구소’ 강원남 소장이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