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밝골 칼럼] 함께 돌보는 죽음, 곧 삶을 향하여

어렴풋하든 선명하든 누구나 죽음에 대한 이미지들을 갖고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먼저 긴 행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언덕 위 시골집에 살던 시절로부터 물려받은 한 조각일 것이다.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 기다란 만장들이 펄럭이고 상여꾼들의 구슬픈 소리(挽歌)가 들려오면 무작정 행렬의 끄트머리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꼬리를 만드는 아이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고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철부지 아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을 치고, 장지까지 따라가서는 떡이며 과일을 받아들고는 장지(葬地) 주변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고인을 보내는 엄숙한 순간을 어지럽히는 이 불청객들을 쫓아버릴 법도 하건만, 그런 면박을 받은 경험은 없다.


[사진 출처: 박수관 명창 장례식 상여소리 youtube 영상 갈무리 https://youtu.be/MQ57RpekObM ]

한동안 그런 경험이 부끄럽게도 느껴졌지만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갖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한다는 것, 비록 모두가 온전히 회한과 슬픔에 빠지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것을 죽음이라는 하나의 매듭을 앞에 두고 그와 함께 했던 이들, 또 앞으로 더불어 살아갈 이들이 공동의 삶을 되새기는 의식이라고 해석한다. 비극적인 순간을 되새김질에 비유하다니, 불손하기 짝이 없는 표현 아닌가. 하지만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보면 이웃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거나 되도록 빨리 망각하려는 것과, 죽음 앞에 모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사의 의미를 나누는 모습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족 단위를 넘어서는 수준의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이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 하기는 쉽지 않지만 출생 이후의 삶을 함께 한 다른 구성원의 죽음은 다수가 함께 돌볼 수 있다. 그리고 건강하고 성숙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면 한 개인의 여행이 끝난 바로 그 지점에서 더불어 살아갈 오늘과 내일을 확인하는 기회를 갖는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의 차원에서 장례(葬禮)라는 의식은 서로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운명체라는 사실을 새삼 더듬어보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의 죽음 역시 함께 이처럼 많은 이들의 송별 속에 이뤄질 것이라는 무의식중의 기대는, 오히려 생의 종결보다 삶 자체에 커다란 위안과 연대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죽음에 삶을 비춰볼 때 개인과 공동체의 삶은 좀 더 단단해질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삶은 죽음에서 생긴다. 보리가 싹트기 위해서는 씨앗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죽음을 삶과는 동떨어진 무엇으로 치부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사실과 함께 우리 공동체가 개인의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사진 출처:https://pixabay.com/photos/wheat-grain-crops-bread-harvest-1530321/ 사진작가: Pavlofox ]

성장과 효율이라는 구호 아래 우리 사회는 너무나 급하게 내달려왔고, 또 그 와중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다. 도시에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 마음을 열고 교감하면서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적다. 흔히 말하듯 현대사회의 개인들의 삶은 파편화되어 다른 이의 삶은 물론 죽음을 돌볼 겨를이 없다.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볼 때 개인을 전체로 묶든, 전체를 개인으로 잘게 쪼개든 거기에서 어떤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하지 않는다. 개체와 개체, 개체와 전체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관계는 군더더기로 치부되기 쉽다. 나아가 단기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경제 시스템, 개인을 잇는 연대를 성가시게 여기는 정치체제에서는 개인들이 서로 동떨어진 섬으로 남아 있는 편이 훨씬 이윤 친화적이고 또 다루기 수월하지 않을까.

정서적인 관계들이 끊어져버리고 서로 보살필 여유가 없는 개인들의 집합은 마치 파도 앞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모래알처럼 처량하다.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이웃’이지만 간혹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의 죽음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되는, 희극 같은 비극 속에 살고 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죽음은 현대인들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각자 선택과 무관하게 어느 정도 객체로 살아가는 우리는 각자의 삶, 체온을 나눌 수 없다는 묵인된 체념에 잠겨 있는지 모른다. 생면부지의 죽음을 함께 돌봐야 한다는 주장은 이 같은 현실을 외면한 말로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같은 공간에 모여 치열한 경쟁과 함께, 아니 그 덕분에 경제적 풍요와 당장의 안락을 좇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애초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외떨어진 삶에 이어 고립된 죽음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공감대와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이웃의 죽음을 함께 돌보면서 삶의 연결고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조금씩 힘이 실린다. 최근 웰빙(well-being)과 함께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그저 개인의 안락만을 찾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삶은 물론 죽음으로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we’ll be, we’ll die)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글은 나눔과나눔 이사로 활동하고 계신 화우공익재단의 함보현 변호사가 작성했습니다.
“달밝골은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 있는 마을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