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연 칼럼] 이제는 ‘존엄한 죽음’을 이야기하자! – 존엄한 죽음을 위한 웰다잉(Well- Dying)문화 조성의 필요성 –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임종기 의료처치 여부를 결정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이하 의향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개인 차원에서 작성되던 것이 이제는 점차 부부 단위, 가족 단위, 친구 단위, 이제는 교회, 직장 등의 단체에서 작성되고 있다. 특히 노인복지현장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의향서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90대 고령의 노인이 지팡이와 손자의 어깨에 의지한 채 의향서를 작성하러 오실 정도이다. 그분들의 바람은 한결같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중환자실에서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고, 자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연명의료를 받지 않는 대신 어떤 죽음을 원하시나요?” 의향서 작성이 끝나면 꼭 여쭤보는 질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한 질문에 선뜻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는 분은 많지 않다. ‘그리 죽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갖지만, 그 대신에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부재한 것이다. 생애 말기에 이루어지는 결정들에 단지 연명의료 결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임종의 시기에 우리는 왜 연명의료를 받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가? 과연 존엄하고 품위 있는 죽음은 무엇이며, 우리는 왜 그러한 죽음을 소망하는가? 우리가 소망하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더 늦기 전에 자신에게,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사진설명: 20대로부터 30대, 40대, 50대, 60대까지 총 14명의 가족 전원이 설날 예배와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풍경, 출처:연명의료결정법 시행 1년과 그 의미/20190319 참조]

죽음에 대한 시각은 문화적, 역사적 산물이다. 시대에 따라 죽음의 성격 또한 규정된다.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는 21세기를 ‘금지된 죽음’의 시대로 규정한다. 놀랍도록 발전한 과학기술과 의료기술은 죽어가는 환자도 살리고, 생명도 연장하며, 장수에 대한 꿈도 실현하고 있다. 의료현장에서 죽음은 의료의 실패로 간주되고, 그러한 경향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리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임종을 맞이해야 할 환자까지도 죽지 못하게 만드는 사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her)는 ‘죽음의 부정’을 말한다. 일상에서 자연스레 경험하고 학습되던 삶과 죽음의 생명현상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사람들은 매스컴을 통해 충격적인 사건‧사고, 살인, 자살 등을 일상적으로 접하기 때문에 죽음은 점차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현대사회에서의 죽음은 금지되고 부정된다.

우리 사회의 죽음의 현실은 어떤가? 의료현장의 ‘금지된 죽음’ 현상과 일상에서의 ‘죽음의 부정’ 현상이 맞물리면서 죽음의 질은 매우 낮아지고 있다. 1년에 28만 명(2016년 통계)이 죽는데, 10명 중 8~9명이 만성질환으로 죽고 있고, 그 가운데 10명 중 7~8명은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와 임종기에 의료집착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병원에서의 죽음은 가족과의 단절, 고통, 그리고 연명의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어르신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실제론 낯선 공간에서 수많은 의료기계에 꽂혀 의사표현도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분리된 상태에서 쓸쓸하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나라 ‘죽음의 질’은 2010년도에는 32위, 2015년도에는 18위이다.(이코노미스트지, 죽음의 질 보고서). 2015년도에 18위로 상향된 것은 전반적인 의료시스템과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이 앞으로 완화의료 정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결과이며, 실제로 죽음의 질은 여전히 열악하다. 게다가 수많은 간병살인, 간병자살, 말기에 고통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의 소식이 비일비재하다. 존엄사 논란을 제기한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과 2009년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은 [연명의료결정법]이 도입된 직접적인 배경이기도 하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죽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한국인의 마지막 10년, 출처 2013. 11. 조선일보 참조]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 이런 죽음의 현실, 의료현장에서 맞게 되는 결코 존엄하지도 품위 있지도 않은 죽음, 그 죽음으로부터 잃어버린 인간성, 인간다움을 찾고자 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등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사전의료의향서 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의 직접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가 호스피스-완화의료다. ‘죽어가는 사람은 곧 살아가는 사람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들이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인 듯 다른 사람으로부터 취급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어가고 있는 한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이다.’(퀴블러 로스 Kubler Ross) 호스피스-완화의료는 환자가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살아있는 존재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 돌봄에 이르는 총체적 돌봄을 제공한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또 하나의 대안은 연명의료계획서 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이다. 그러나 이 문서는 임종 시 의료처치에 국한되어 있으며,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선택한다면 이 부분은 많이 해소된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제기되는 것이 안락사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안락사도 불법이다. 그러나 이미 이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곳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최근 방영이 종료된 SBS 드라마 <의사 요한>에서도 안락사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사회적 관심의 반영이라 할 수 있으며, 향후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리라 본다. 다만 이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는 안락사에 대한 단순한 찬반 논쟁에 앞서 무엇이 존엄한 죽음인지, 죽어가는 사람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그러한 죽음을 소망해야 하는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존엄한 죽음이란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간다운 죽음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은 인간만이 존엄하고, 품위 있고, 좋은 죽음(Good Death)을 꿈꾼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강아지도 죽고 식물도 죽고, 인간도 죽는다. 이러한 죽어감(Dying)의 현상은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어감의 존재이며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이다. 그저 수동적으로 죽어가는 존재 그 이상을 넘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죽음을 성찰하고 준비하고 맞이한다. 그것이 인간다움이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을 임종(臨終)이라 부른다. 임(臨)은 맞이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죽음교육교본, (임병식, 신경원 공저)]


[사진설명: 임종을 앞둔 환자와 온 가족과 의료진이 함께 마지막 사진을 찍고 있다. 출처: 영화 <목숨>의 한 장면]

작년 추석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향년 87세, 수년을 앓으셨고, 급성 폐렴이 와서 2주간 사투를 벌이고 돌아가셨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비위관(일명 ‘콧줄’)이 삽관되고, 침대에 묶이셨다, 환자의 의사나 가족의 동의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손을 풀어다오 밥 먹게’, ‘물이 먹고 싶다,’ ‘물 한 방울만 다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는 바싹 말라가는 입으로 반복적으로 고통을 호소하셨다. ‘조금만 견디시면 회복되실 거예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임종 증후를 보이는 분께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버지의 상황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만도 내겐 트라우마다. 아버지도, 가족도 임종에 따른 그 어떠한 연명의료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명의료결정법]에서는 영양분 공급, 수분 공급은 ‘당연한 인간의 도리’로서 반드시 제공해야 할 항목에 포함된다. 이에 대해 ‘누구를 위한 의료처치’인지 묻고 싶다. 거기엔 인간의 존엄성도 품위도, 그리고 환자의 바람도 없었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고령화를 겪고 있다. 급격하다는 건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가올 고령사회, 초고령사회는 다(多) 죽음 사회, 임종대란 등으로 예견되기도 하지만, 분명한 건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결코 존엄한 죽음, 인간다운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일상에서 소외된 죽음을 다시 일상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바야흐로 존엄한 죽음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존엄한 죽음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대화가 필요한 때이다.

 

이 글은 싸나톨로지스트(Thanatologist)이자 창동노인복지센터 관장인
나눔과나눔 박미연 이사가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