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장례지원] 내 아내는 무연고가 아닙니다

[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9월 장례이야기
내 아내는 무연고가 아닙니다

 

여름과 가을이 만나는 길목에서 만난 무연고 사망자들은 그들이 왜 무연고 사망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라는 듯 많은 수수께끼들을 남겼습니다. 그들에게도 사는 동안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사망소식에 가슴 아파하며 마지막을 찾아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무연고’ 사망자로 보내기 싫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함께한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그들이 장례에 참석한 이유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숙제를 던졌습니다.

 


(사진 : 아내를 무연고 사망자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실혼 관계의 남편)

“내 아내는 무연고가 아닙니다”
9월 초 무연고 사망자 장례식. 서울시 공영장례 수행업체의 운구차량에서 관이 내려졌고, 트레일러에 실려 화장로로 향하는 행렬에는 공영장례 상담지원센터인 비영리법인 ‘나눔과나눔’의 활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행렬의 가운데에 한 남성이 그 뒤를 따랐고, 자신의 눈앞에서 관이 화장로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이날 장례를 치른 무연고 사망자 ㄱ님은 60대 초반의 여성으로 지자체에서 발송한 무연고 사망자 장례의전의뢰 공문에는 연고자가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지자체 담당자로부터 따로 참석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지 못했고, 수행업체의 일정에 따라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남성은 자신이 ㄱ님의 사실혼 관계의 남편으로 16년 동안 함께 지냈다고 했습니다. ㄱ님이 병으로 입원한 후 간병을 해왔던 남편은 아내의 병세가 위독해지면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며 여러 차례 고비를 겪다 끝내 지난 8월 말 사랑하는 아내와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오랜 입원 기간 동안 600~700여 만 원의 카드빚이 남았습니다.
남편은 장례식장에 빈소를 마련해 장례를 준비하던 중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신인수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청, 동주민센터, 경찰서를 찾아가 아내의 지인들을 보증인으로 세워 서명을 받아주겠다고 하소연까지 했지만 서류상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ㄱ님은 다른 연고자를 찾을 수 없어 무연고자가 되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고, 남편은 10년 동안 안치될 무연고 추모의 집으로 아내의 유골함을 보내며 오열했습니다. “아내가 생전에 어머님이 묻혀 있는 선산에 화장해서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어요. 그 소원을 꼭 들어주고 싶었는데……”

 


(사진 : 무연고 사망자가 된 친구의 장례식에서 술을 올리고 있는 친구)

친구의 유골 한 줌 좋은 곳에 뿌려주고 싶었어요
9월 중순 장례를 치른 무연고 사망자 ㄴ님은 60대 초반의 나이에 고시원에 살다 돌아가셨고 연고자가 없어 무연고자가 되었습니다. 장례식에는 먼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분이 참석했습니다.
“해병대 동기예요. 친구가 요리사였는데 저랑 마음이 잘 맞아서 지방에서 식당도 크게 했어요. 남들한테 못하는 속 얘기도 다 털어놓는 사이였어요.”
ㄴ님과 막역하게 지내다 헤어지게 된 이유는 사업 실패였습니다. 점점 뜸하던 연락이 어느 순간 안 될 때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경찰로부터 ㄴ님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고, 친구분은 지자체 담담자에게 화장하는 날에 꼭 참석할 수 있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친구에게 아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호적에는 올라가 있지 않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연고 처리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친구 아들이랑 연락을 하게 해달라고 경찰한테 부탁을 했는데, 전화가 안 오더라고요.”
ㄴ님 사망 후 수사를 맡았던 경찰은 아들에게 사망소식을 전했고, 이후 친구분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아들은 ‘연락하고 싶지 않으니 전화를 하지 말아달라.’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친구 유골을 좋은 곳에 꼭 뿌리고 싶었어요. 화장하고 그냥 아무데다 뿌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멀리서 왔는데, (무연고 장례식) 하는 거 보니 안심이 되네요.”
친구분은 장례식 내내 ㄴ님과의 추억을 이야기했고, 공영장례로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사진 : 같은 공간에 살았던 이의 장례에 참석한 쪽방촌 주민들)

또라이는 또라이를 알아본다
9월 말 장례를 치른 무연고 사망자 ㄷ님은 사망 당시 50대 후반이었고, 서울시의 한 쪽방촌에 살다 8월 초에 돌아가셨습니다. 미혼으로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형제가 있었지만 시신인수 여부를 묻는 우편물 수령 후 14일이 지나도록 회신이 없어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습니다.
장례 당일 ㄷ님이 사셨던 쪽방촌에 사시는 주민분들이 서울시립승화원에 참석했습니다. 주민분들은 ㄷ님의 영정사진을 준비해오셨고 운구에서부터 장례, 유골함 운반까지 함께했습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생전 이야기를 듣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지인분들이 참석할 경우는 운이 좋게도(?) 생생한 일화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주민분들은 ㄷ님은 돌아가시기 전 요앙병원 입원비가 아까워 입원을 안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미련 한 푼 남기지 않고 가셨다며 자신들도 그렇게 살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주민 중 한 분이 ‘또라이는 또라이가 알아본다.’라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물으니 ‘그리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 인생의 풍파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 알아보고,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사람을 알아본다는 이야기. 생활이 넉넉지 않은 쪽방촌 주민들은 만나서 몇 마디만 나눠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고, 그 바탕에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공감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품고 허물없는 사이로 지내다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면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장례에 참석해 마지막을 보내줍니다. 공영장례가 필요한 이유이자 지향점인 사회적 애도가 무엇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사진 : 어릴 적 함께 지냈던 기억으로 무연고 사망자 장례에 참석한 친척과 자원봉사자들)

무연고 장례에 참석하는 친척들
1인 가구의 비율이 가장 많다는 통계를 접했습니다. 가족이 분화되어 살다 보니 함께 모이는 날도 이젠 각자의 스케줄 속에 비어있는 날짜가 일치하는 날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친척과 얼마나 자주 연락을 하는지 질문을 할까요? 집안행사가 없을 경우 따로 안 만나다 보니까 연락을 뜸하게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혹여 연락처조차 모르고 사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고백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친척 중 상을 당해 장례식장에 가야할 경우 ‘나까지 가야하나’ 망설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살면서 연고자의 범위는 몇 촌까지인지, 장례는 몇 촌까지 치를 수 있는지 등의 궁금증은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르며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시신인수를 할 수 있는 연고자의 범위 안에 4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은 놀랐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9월에는 사촌, 외가쪽 친척분이 참석한 무연고 사망자 장례가 있었습니다.
9월 초 장례에 참석한 사촌분은 고인분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전했습니다. 이제 갓 50이 된 고인분이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문도 모른 채 장례에 참석했다는 사촌분은 시신위임을 한 사람이 누군지도 알 수 없었고, 고인을 그냥 그대로 보내기가 싫었다고 전했습니다.
9월 하순 ㄹ님의 무연고 장례 운구가 진행되는 중 두리번거리는 여성분께 혹시나 하여 말을 걸었더니 마침 장례를 치르는 ㄹ님의 외가쪽 먼 친척이었습니다. 구청 담당자에게서 날짜와 시간, 장소만 듣고 오셨다는 친척분은 하마터면 고인이 화장로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할 뻔 했습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함께 초등학교에 다녔던 두 사람은 ㄹ님이 지방을 떠나면서 자주 못 만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만난 건 6년 전 집안의 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이후 ㄹ님이 사망해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척분은 어렸을 때 추억이 생각나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합니다. 형편이 어려워 장례 당일 식당일을 해야 했지만 화장하는 모습만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아 서울시립승화원으로 온 친척분은 공영장례로 진행되는 장례식을 보고 조금은 놀랐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ㄹ님에게는 다섯 살이 되었을 때 헤어진 딸이 있었다며 친척분은 나중에 꼭 딸에게 보여주겠다며 장례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 2019년 9월 19일 화우공익재단 연수원에서 진행된 사후자기결정권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 고립사·무연사와 공영장례)

가족 대신 장례, 사후 자기결정권
여러 가지 정황상 본인이 무연고 사망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장례를 치러달라는 부탁을 하는 분들의 전화가 ‘나눔과나눔’에 가끔 걸려옵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장사법 상의 연고자가 아니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결론을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전화 속 목소리가 너무나 절실해 진실보다는 사회가 바꾸어 나가야 하는 부분을 설명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으로 전화를 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며 가족이 아니지만 장례를 치르고 싶어 하는 분들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접합니다. 금전이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지만 서류(법)상의 연고자가 아님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어쩔 수 없는 빗장처럼 견고하게 절망을 주고 있었습니다. 고아원에서 함께 지냈던 지인들, 탈북민, 사실혼 관계의 부부, 종교단체 등 무연고 장례에 참석해 울분을 토했던 이들은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이러한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함께 지냈던 누군가를 ‘무연고자’로 만드는 사회는 바뀌어야 합니다. ‘가족 대신 장례’, ‘사후 자기결정권’이 제도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 글은 나눔과나눔 활동을 지지하는 부용구 활동가가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이름들

9월 무연고 기초생활수급자
최상도, 김인근, 성현규, 김기수, 송만수, 오영준, 배우영, 김제형, 이용기, 차민옥, 강태성, 소영옥, 서정훈, 정충길, 김영관, 김정이,

9월 무연고 사망자
노광서, 김문병, 이인찬, 김기진, 김경식, 김상희, 조정희, 김재홍, 불상, 이해필, 김병술, 유준섭, 조민정, 장봉경, 권봉재, 김광복, 구본일

나눔과나눔이 함께 마지막을 동행했던 서른세 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불렸을 이름
나눔과나눔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외롭게 삶을 마감하신 분들의 이름을
함께 기억해주세요.
“Re’member
나의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순간을 공감하는 것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함께 하는 것”
(문구출처 : 마리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