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연 칼럼] 건강한 애도(Good Mourning)문화 조성을 위하여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외롭다는 말은 슬픔과 고통의 표현일 것이다. 슬픔과 고통은 우리가 사랑한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즉 상실로 인해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은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상실과 상실로 인한 외로움, 즉 슬픔과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상실과 사별의 경험 또한 피할 수 없다. 또한 상실의 현실을 제거하거나 돌이킬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실의 현실을 수용하고 상실로 인한 슬픔과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상실의 현실과 더불어 살아갈 힘, 살아갈 지혜가 필요하다. 살아갈 힘을 얻는 작업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애도다.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인생이 그러하니 요란스럽게 울고불고 떠들지 말고 그저 슬픔을 가슴에 묻고 세월에 맡기면 되는 걸까? ‘울지 마라.’, ‘잊어라, 잊어야 산다.’, ‘세월이 약이다.’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사랑하는 이를 잊을 수 있는가? 울지 않으면 슬픔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가? 세월이 흘러가면 저절로 아픔이 치유되는 걸까? 아니다. 우리는 울어야 한다. 충분히 아프다고, 외롭다고, 슬프다고 울어줘야 슬픔을 견뎌낼 힘이 생긴다. 울어준다는 것은 슬픔을 마음속에 밀봉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표현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치유의 출발은 감정의 표현에 있다. 죽음학자 임병식은 ‘모든 narrative는 애도의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Narrative, 즉 말을 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오늘이라고 하는 안정된 환경 안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며, 향후 자신의 소망이 투여된 의식의 지향성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는 것은 억압된 감정을 소산(消散, scatter)하는 것이고, 말을 함으로써 비탄과 동일시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객관적인 힘을 제공한다. 응어리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그 감정을 신체감각인 생리적 감각으로 표현하고 나면, 신체적인 후련함과 더불어 저절로 스며드는 생리적 현상으로 안정감이 찾아온다. 이러한 후련함과 안정감이 자연스레 찾아오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게 되며, 인식차원의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감정에 몰입되었던 의식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게 된다.

우리나라의 2018년도 사망자 통계를 보면, 1년에 298,820명이 사망하고 있으며, 이 수치를 1일로 환산하면 하루 평균 819명이다. 1명이 죽을 때 최소 6명의 주변사람들이 사별로 인한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면, 하루 평균 4,912명의 사람들이 사별로 인한 고통을 겪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많은 사별자들은 어떻게 사별의 고통을 겪어내고 있을까?


[사진설명: 창동노인복지센터 주관 사별자를 위한 슬픔치유프로그램 현수막과 추모의례제단 사진]

창동노인복지센터에서는 2018년에 이어 2019년에 ‘사별자를 위한 슬픔치유프로그램, <다시 시작하는 우리(약칭: 다우리)>’을 진행했다. 사별자들에게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슬픔치유프로그램 <다우리>에 참여한 이들의 공통된 진술이 있다. “누구라도 붙들고 슬픔을 표현하고 싶은데,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 할까봐 미안해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가족들과 말을 안 해요. 슬퍼할까봐 힘들어할까봐 서로 조심하지요.”, “부끄러운 내 애기를 풀어내도 되는 걸까요? 자식 죽인 죄인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도움을 청할까 싶어 도망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직도 그러냐고 손가락질 할까 부끄러워요, 남편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지 10년이 되었지만 어제 일 인양 괴롭고, 나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에 가슴에 응어리가 남아 힘들어요. 자식들도 친구들도 누구도 이런 내 마음을 몰라요.”

현실적으로 많은 사별자들이 스스로 애도하기를 주저하거나, 주변의 반응에 의해 애도를 포기하거나, 혹은 문화적 요인에 의해 애도를 금지당하기도 한다. 특히 사별에 대한 죄책감, 죄의식은 너무나 강하다. 사별하고 나면 지난 세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과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자식 앞세운 죄인, 남편을 어찌어찌한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으며, 특히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미망인은 말 그대로 아직 따라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알게 모르게 미망인이라는 내재화된 죄인의식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작용해 애도는커녕 자신을 비난하거나 타인을 비난하게 한다. 그리고는 풀리지 않은 슬픔을 응어리로 한으로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사별은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남겨진 이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별의 슬픔은 정서적 슬픔만이 아니라 인지적으로, 생리적으로, 삶의 태도로, 영적 물음으로 우리의 온 마음과 온 몸과 온 존재를 흔들어버리는 비탄으로 찾아온다. 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배우자 사망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100점 만점에 100점으로 이혼하거나, 구속 및 해고를 당하거나 그 어떤 상실보다도 가장 크다. 또한 사별로 인한 극심한 슬픔은 체내 염증 수치를 증가시키고,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우울증과 심장마비, 조기 사망, 뇌졸중에 걸릴 가능성을 높인다. 애도작업은 슬픔을 치유하고 고인이 떠난 변화된 삶에 재적응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예방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슬픔치유프로그램 <다우리>는 이야기(narrative)를 통한 감정해소와 의식의 변화, 그리고 의미화의 과정에 목표를 두었고, ‘용기 있게 이야기하기,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공감으로 경청하기, 서로를 보호하기’ 등의 집단 규칙을 통해서 사별자들이 충분히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한 자녀사별자의 사례를 소개한다. ‘자식 앞세운 죄인’이라는 낙인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억압하고, 주변에는 내색하지 않으나 그 분노를 남편에게 표출함으로써 부부 모두가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너무나 힘들어 도움을 받고자 찾아는 왔지만 살겠다고 도움을 청하는 자신이 용납이 안 된다고 표현했다. “가슴 속에 꽁꽁 묶어둔 딸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요.” 충분히 애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또 억압당했던 그 슬픔의 빗장을 열고 공개적으로 아픔을 풀어놓기 시작하면서 초기에는 극도의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였으나 서서히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였고 마음의 편안함을 갖게 되었다. “무슨 정신치료시설에서 치료받고 나온 기분이에요. 잠도 잘 자고 편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50~60% 치유가 된 것 같아요.” 향후에도 아픔은 겪겠지만 삶을 긍정하며 살아갈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온전한 위로는 타자에 대한 존중과 경청과 공감에 기반한다. 사진출처: <https://brunch.co.kr/@jhyunwriter/208>]

사별자는 충분히 애도해야 하고, 주변으로부터 충분히 위로와 공감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 죽음학자 George Bonanno는 회복력 궤도(resilient trajectory)라는 개념을 통해서 사별자의 대부분은 극도의 역경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교적 안정적인 적응력을 보인다고 한다. 즉 우리에게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별자 스스로 충분히 애도하고, 타인의 애도를 지원하는 환경의 조성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사회, 즉 다(多)죽음사회를 살고 있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죽음과 죽어감의 문제와 더불어 사별자들의 아픔을 건강하게 풀어낼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슬픔치유 프로그램 <다우리>와 같은 사회적 지지 프로그램은 그 가운데 하나며, 사회 전반적으로 애도교육이 활성화되어 건강한 애도를 돕는 문화가 조성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죽음교육전문가(싸나톨로지스트)인 
나눔과나눔 박미연 이사가 작성한 글입니다.